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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경구, 감정을 터뜨리던 배우에서 감정을 숨겨 연기하는 배우까지

by 나헤이 2025. 12. 9.

설경구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박하사탕」의 한 장면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기찻길 위에서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던 장면입니다. 그 얼굴에는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향한 절규가 담겨 있습니다. 데뷔 초반부터 지금까지, 설경구는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로 기억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작품들을 차분히 다시 보면, 예전의 ‘강렬함’과 지금의 ‘강렬함’은 성격이 많이 다릅니다. 이 글에서는 초반 필모그래피와 최근작을 비교하면서, 설경구가 어떻게 연기 스타일을 변화시켜 왔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초기작 연기 스타일 분석

실미도 포스터

설경구의 이름을 널리 알린 작품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박하사탕」(1999), 「오아시스」(2002), 「실미도」(2003) 등이 있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대부분 편하게 보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부담을 느낄 수 있는 영화들입니다. 이 시기의 설경구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배우였습니다. 「박하사탕」에서 그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구조 속에서 한 남자의 인생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시간이 과거로 갈수록 감정 표현은 더 거칠어지고, 표정과 몸짓은 점점 더 극단으로 향합니다. 「오아시스」에서 그는 사회에서 밀려난 인물을 연기합니다. 폭력성과 순진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캐릭터를 통해, 관객에게 불편함과 연민을 함께 전달합니다. 「실미도」에서는 분노와 좌절을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인물을 맡습니다. 고함과 거친 행동을 통해 집단의 감정을 대표합니다. 당시 설경구의 연기는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표정과 몸 전체를 사용해 감정 상태를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연기 방식은 그때의 한국 영화 분위기와도 잘 어울렸습니다. 1990~2000년대 한국 영화는 사회 비판, 집단의 분노, 폭력의 구조 등을 자주 다뤘습니다. 관객 역시 강한 감정 표현을 통해 어떤 해소를 느끼고자 했고, 설경구는 그 안에서 대신 소리쳐 주는 배우 같은 존재였습니다. 다만 이 시기의 연기에 대해서는 감정의 힘은 뛰어나지만, 인물의 세밀한 결보다는 큰 감정선이 먼저 보인다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즉, 인물을 섬세하게 해석하기보다는, 감정의 강도를 우선 보여주는 연기로 보이기도 했습니다.

최근작 연기 스타일 분석

자산어보 포스터

시간이 지나 최근 필모그래피를 보면, 설경구의 연기는 많이 달라져 있습니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2017), 「자산어보」(2021), 「킹메이커」(2022), 「길복순」(2023) 등에서 그는 예전처럼 쉽게 목소리를 높이지 않습니다. 대신 표정의 미묘한 변화, 말과 말 사이의 침묵, 시선 처리가 연기의 중심에 자리합니다. 「자산어보」에서 설경구가 연기한 정약전은, 과거 그가 보여준 거친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와 절제된 표정으로 인물을 표현합니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지만, 인물의 신념과 내면의 단단함이 대사와 시선 속에 담겨 있습니다. 「킹메이커」에서 그는 정치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참모를 연기합니다. 이 인물은 극단적인 행동을 자주 보이는 캐릭터가 아닙니다. 그러나 설경구는 작은 변화들을 쌓아가며 복잡한 심리를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말끝을 조금 낮추거나, 잠깐 시선을 피하거나, 손가락 끝을 가볍게 움직이는 정도의 액션만으로 인물이 처한 상황과 고민을 드러냅니다. 또한 최근 작품에서 설경구는 선악이 명확히 나뉘지 않는 인물을 자주 연기합니다. 「길복순」에서 그가 맡은 캐릭터 역시 완전히 선하거나 악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는 킬러 세계 안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인물로, 규칙과 감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처럼 최근의 설경구는 회색 지대에 있는 인물을 자연스럽게 소화합니다. 감정을 크게 터뜨리지 않지만, 관객은 그가 말하지 않는 지점에서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됩니다.

연기 변화의 핵심 포인트

같은 배우인데도, 시기별로 이렇게 다른 인상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몇 가지 관점에서 변화의 포인트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초반: 감정을 밖으로 강하게 밀어 올리는 방식입니다. 울부짖고, 고함치고, 몸을 던지며 관객에게 정서를 직접 전달합니다.
  • 최근: 감정을 안쪽에 머물게 하는 방식입니다. 말하지 않는 순간, 멈춰 있는 표정, 짧은 침묵을 통해 감정을 드러냅니다. 관객이 스스로 인물의 상태를 해석하게 만드는 연기입니다.

1990~2000년대 한국 영화는 사회 구조, 집단의 상처, 폭력의 순환 등이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따라서 배우에게도 강하고 직접적인 감정 표현이 많이 요구되었습니다. 2010년대 이후, 특히 2020년대에 들어서는 개인의 내면, 관계의 균열, 이상과 현실 사이의 미묘한 지점이 중요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배우의 연기도 자연스럽게 더 절제되고, 더 내면으로 향하는 방향으로 변했습니다. 

 

배우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장점과 부담을 동시에 가져옵니다. 젊을 때처럼 거친 액션과 과감한 감정 폭발을 계속 보여주기 어렵고, 그렇다고 힘이 빠진 모습만 보여 줄 수도 없습니다. 설경구는 이 사이에서 자신만의 방향을 만들어 온 배우로 보입니다. 초반에는 누구보다 강하게 소리치고, 감정을 폭발시키는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지금은 목소리를 낮추고 움직임을 줄이면서도, 여전히 강한 여운을 남기는 연기를 선보입니다. 그래서 그의 필모그래피를 시간 순서대로 다시 보면, 단순한 연기 스타일의 변화가 아니라 한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어 온 기록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론

설경구의 영화들을 처음 개봉했을 때 그대로의 순서로 다시 보는 일은, 한 배우의 연기 변화를 따라가 보는 일입니다. 동시에, 한국 영화가 어떤 방향으로 변해왔는지를 함께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1990~2000년대 작품에서는, 소리를 높여 감정을 드러내던 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최근 작품에서는, 감정을 길게 끌어올리기보다는 안쪽에서 조용히 다루려는 지금의 분위기가 드러납니다. 이 글을 계기로 설경구의 이름이 적힌 영화들을 다시 찾아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미 본 영화라 하더라도,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다른 장면이 눈에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장면들 속에서 예전보다 더 차분해졌지만, 동시에 더 깊어진 설경구의 얼굴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